나는 1월 13일 공무원으로 임용된 운전직 9급 주무관이다.
공무원이 되기 전 11년 간 육군 보병장교로 근무했다.
군대에서 다양한 훈련을 경험했지만 올해 2,3월만큼 두려움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경험한 청도군 보건소 코로나19 대응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2월19일 청도군 대남병원에 코로나19 환자가 전국에서 최초로 집단 발생한다.
보건소는 19일부로 폐쇄되었고 동시에 비상 근문가 시작되었다.
보이지 핞은 바이러스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20일 모든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한다.
민원인, 기자, 군청실무자, 경북도청, 질병관리본부 등등 정신없이 전화기가 울린다.
전화 벨소리가 전쟁에서 날아오는 총탄과 흡사하다.
개인별, 부서별, 업무는 분장 되었지만, 처음 경험하는 감염병 대응 업무에 모두 정신이 없다.
코로나19 대응 매뉴얼, 업무 참고서는 없다. 우리가 하는것이 매뉴얼이 되고 업무 참고서가 되었다.
병원과 같은 건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보건소 직원들은 접촉자로 분류되어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공중보건의사가 방역복을 입고 직원들을 검사 했고, 의사들도 서로 검사를 한다.
감사하게도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 이다. 그러나 잠복기를 고려하여 2주간 격리 및 보건소 폐쇄에 들어갔다.
갑자기 진행된 상황이라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도 식사할 수 있는 식재료도 전무 했고,
음식점은 감염에 대한 부담감으로 배달도 거절했다.
어렵게 구한 컵라면으로 며칠 배고픔을 달랜다.
정문에는 기자들이 약 20명이 대기하고, 직원들의 사소한 행동에도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모든것이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코로나 19 대응 업무 중 가장 힘든 업무가 무엇이냐 물어보면 환자 이송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차량배차, 이송 요원 선정, 병원 선정, 시간 조율 등 준비단계부터 복잡하다.
하계장님은 2,3월 넘쳐나는 이송환자로 인해 하루 100여통 이상의 전화를 받고 업무 조정을 했다.
전화량이 많다 보니 청각에 문제가 생겨 약을 먹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가슴이 아프고 감사한 일이다.
현장에서 환자들과 직접 접촉하는 업무도 중요하지만,
현장을 지원하는 행정 책임자와 실무자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19구급대가 본격적으로 지원되기 전까지 보건소 직원들은 전국으로 환자를 이송했다.
의료 자격증이 있는 직원은 의료진으로, 자격증이 없는 직원은 행정요원으로 업무에 임했다.
이송이 시작되면서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다.
방역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확진자를 돌보는 것은 평소보다 2배 이상의 체력이 소모되었다.
왕복 10시간 소요되는 장거리 이송에 참여한 직원은 확진자와 동승으로
감염의 두려움, 더위, 차량 멀미와 생리현상인 화장실 사용을 스스로 제한하고자
심한 갈증에도 물 한모금 먹지 않고 환자 이송에 참여했다.
정신과 환자 중 확진자 이송은 돌발행동 위험이 추가되어 고도의 긴장감과 집중 관리가 요구되었다.
구급차 이동 중 마스크,방역복을 벗거나 돌발행동 등 의료진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로 인해 동승한 직원이 환자의 방역복을 벗기고 주사를 주었다.
이송하는 날 생일이었던 나의 동기 이주무관의 야기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2월 24일 23시 서울로 확진자를 급하게 이송하는 것이 결정되어
정신없이 방역복을 입고 의료진으로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때 이주무관 가족들은 이송업무에 투입된지 모르고 새벽에 생일축하 영상편지를 보낸 것이다.
"영상 편지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솥아지더라." 라고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하는데, 듣고 있던 직원들도 눈물을 흘렸다.
지금부터는 나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는 운전직으로 방문 보건업무와 구급차를 담당하고 있다.
보건소 배치 이후 의료지원은 다수 있었지만 환자 이송은 2월 20일 대남병원 확진자가 처음이었다.
확진자 이송의 부담감과 감염에 대한 두려움은 나를 더욱 위축되게 만들었다.
20일 오전, 오후 2회 이송이 있었는데 오후 이송은 거동이 불편한 50대 여성 환자였다.
구급차를 병원 정문으로 이동하였더니 기자 20명이 구급차 주변을 둘러싸고 질문한다.
카메라 플레시가 터지고 얼굴 주변으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국민들이 보고 있다는 부담감, 무엇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정신이 없다.
다만, 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하고 복귀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병원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내부로 들어가니 직원들은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고 바닥은 축축하고 끈적끈적하다.
이송환자는 내가 봐도 심각한 상태이다.
산소 호흡기가 연결되어 있고, 추운지 온몸에 경련과 발작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방역복 사이로 보이는 피부 색깔이 시커멓게 보인다.
나와 간호사가 부축해서 이동식 배드로 옮긴 후 부산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감염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없어지고 환자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부산에 도착하고, 환자를 병원 간호사에게 인계한 후 마지막으로 환자에게
"힘내시고 완치 하세요." 라고 이야기를 하니 환자는 말없이 눈을 깜빡인다.
이송을 마치고 보건소 정문에서 방역복을 벗는다.
기자들이 몰려와 마이크를 들이대었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에 화가난다.
사진 촬영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샤워를 하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데 TV 뉴스에 내 모습이 보조 영상으로 나온다.
어떻게 행동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뉴스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부산으로 이송한 영상은 1주일간 집중적으로 방송되었다.
출연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 해 본다.
30대 중반까지 직업군일을 했기 때문에 나의 머리는 항상 짧았다.
전역을 하며 머리를 기르게 되었고, 아내 권유로 파마를 하였다.
처음 파마를 했을 때 거울에 비친 내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한 기억이 난다.
코로나19를 겪으며 2년간 유지한 파마는 짧은 머리로 돌아갔다.
방역복 입을 때 불편한 부분도 있었고 삐져나온 머리카락에 바이러스가 묻으면 감염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내는 훌륭한 미용사다.
이발하는 핑계로 오랜만에 아내의 미용실을 방문했는데 우리 둘뿐 이었다.
서로 마스크를 착용했고 나는 비닐장갑도 착용해서 인지,
현재 우리 모습이 웃겨서 그런지 어색한 웃음 뿐이다.
머리 스타일은 '이태원 클라스' 박서준 머리다.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냥 웃을 뿐이다.
3월 중순부터 확지자보다 완치자 이송이 늘어났다.
완치자 이송시 보호자가 동반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명의 보호자 중 50대 여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완치된 언니를 집으로 이송하기 위해 충북대학병원까지 함께 이동하면서
코로나19로 힘들었던 부분, 가족에 대한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사하게도 보건소 직월들이 힘들었던 부분에 대해 공감해 주었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주셨다.
그분은 언니 퇴원 후 며칠 뒤 문어를 삶아서 보건소 전 직원이 먹을 수 있게 보내주었는데
나는 문어를 받은 날도 구급차 운행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이 행복해지는 보람찬 하루였다.
현재 청도는 청청구역으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청도군민과 모든 관계자들이 노력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힘든것이 아니었다.
모든 관계자는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힘든 시간을 이겨냈고 서로 격려하며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구급차 담당이기 때문에 이송업무 일부분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작성된 수기도 대부분 그런 내용이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우린 다이나믹한 상황을 경험했고, 다양한 사례를 남겼다.
이 모든것을 수기로 작성 할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고생한 직원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글을 작성하는 순간에도 묵묵히 코로나19 대응업무는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할수 있다! 이겨 낼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지금도 고생하시는 모든 의료진과 관련 종사자들에게 감사하다.
오늘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힘찬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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